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산함 사건 (문단 편집) === 중산함의 출항 === 장제스와 왕징웨이, 공산당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중산함이 출항했다. 중산함은 원래 [[영풍함 사건]] 때 쑨원의 목숨을 구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기함인 영풍함으로 쑨원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함으로 개명되었다. 사건의 문제가 된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26년 3월 18일 오후 6시, 황푸군관학교 교통계 직원 리스융이 교장판공청 주임 쿵칭루이에게서 상선 한척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으니 순시선 1척과 위병 16명을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스융은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 사무실에 전화해 순시선 파견을 요청했고 광저우 판사처 교통계 직원 왕쉐천이 이를 교통계장 어우양중에게 보고했다. 이때 전화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쉐천은 요청의 주체가 교육장 [[덩옌다]]라고 생각하여 보고하고 해군국에 교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섭을 기다리지 않고 순시선 1척을 파견하였다. 해군국을 찾아간 어우양중은 마침 자리를 비운 해군국장 리즈룽 대신에 해군국 참모청 작전과장 쩌주이에게 자신의 직원이 교육장으로부터 [[장제스|교장]]의 명령을 전달받았다고 하면서 병함 2척을 황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들은 쩌우이는 상황이 급박할지도 모른다 여겨 보벽함을 황푸로 파견한 다음에 리즈룽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중산함과 자유함 두척 중 어느 배를 보낼 지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리즈룽은 자유함을 파견하기 위해 함장 셰충젠과 접촉했으나 자유함이 수리 중인지라 중산함을 보내기로 하고 어우양중에게 정식 공문서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벽함과 중산함 함장에게도 공식 명령서 교부를 요청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순시선 한척 파견 요구가 병함 두어척 파견 요구로 바뀌고, 교장판공청 주임의 요청이 교육장을 통한 교장의 명령으로 바뀐 것이 보인다. 8시 30분, 해군국으로 돌아온 어우양중이 10시에 황푸로 전화해 해군국과 교섭하여 병함(보벽함) 1척을 보냈으니 12시 쯤 도착할 것인데 보초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전했다. 중산함은 19일 오전 7시에 출항, 황푸에 도착했다. 황푸에 도착한 후 대리함장 장퉁신은 교육장 덩옌다를 만나려 했으나 그가 바빠 부관 황전우를 대신 만났다. 장퉁신은 황전우에게 리즈룽의 명령서를 황전우에게 보여주고 장제스의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리즈룽은 소련조사단이 중산함을 시찰하려 한다는 쩌우이의 보고를 받고 장제스에게 중산함을 회항시켜도 되겠느냐고 전화로 묻게 되었다. '''당연히 배의 출항을 명령한 적이 없던 장제스는 경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